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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로마인이야기 by 시오노나나미> 클레오파트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여왕이었다.

by 센스쟁이야 202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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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는 기원전 69~30년까지 고대 이집트 3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다.
현대 영웅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면서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한 여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하여 어렸을 때부터 9개 국어를 했고, 방대한 독서와 학자들의 토론으로 화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선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기원전 51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공주와 두 왕자를 남겼는데 당시 18세인 클레오파트라가 맏이였다.
선왕의 유언장에는 두 가지가 적혀 있었다.
- 맏공주와 맏왕자가 공동으로 통치할 것,
- 이집트 왕실은 앞으로도 계속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남을 것

그러나 처음에는 유지를 받들어 공동으로 통치하다 소년 왕의 측근들이 야심만만한 클레오파트라를 배제시켰다.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클레오파트라는 병사를 모아 왕위를 탈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 정세 회담에서 오누이가 화해하고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판정을 내렸다.
현실주의를 현실과 타협으로 해석한다면,
이 시점에서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소년 왕을 편들어 이집트 정세를 안정시키는 편이 더 타당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왜 클레오파트라 편을 들어줬을까?

첫째, 명석한 두뇌와 강한 의지를 가진 클레오파트라가 공동 통치자의 한 사람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왕은 측근들의 영향을 받기 쉬운 나약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 을 안 후 더더욱 그랬다.

이후 역사가 파스칼은 클레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고 말하고
플라타르코스는 판정이 내려지기 전날 밤 클레가 깔개로 몸을 감싸고
궁내에 몰래 침입하여 미인계를 썼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애인이 된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조건이 까다로운 남자였다.
풍부한 유머와 지적 수준을 갖춰 대화가 통해야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로 카이사르는 그녀의 매력에 빠졌을 것이다.

둘째, 카이사르는 소년왕이 폼페이우스 살해를 모의하고 실행한 살인자들의 죄를 눈감아 주지 않았다.
소년왕을 단독 통치자로 왕위에 앉히는 것은 살인죄를 눈감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의 심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집트 민심도 공동 통치를 원했다.

그러나 정치적 이분화되어있던 소년 왕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공격했다.
다섯 달의 전쟁 끝에 전쟁은 카이사르가 이기게 되고 소년 왕은 패주 하는 군대의 혼란에 휩싸여 전사했다.
프롤레마이오스 14세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기에 이집트 왕위는 사실상 22세 클레오파트라가 차지한 셈이 됐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맑은 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듯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
유언장 공개되면서 크게 실망한 안토니우스는 다른 뜻을 품게 된다.
처음에는 이두정치로 옥타비아누스와 공동통치를 하고자 한다.
서방은 옥타비아누스, 경제적 풍요와 속주세가 풍부한 동방은 안토니우스로 정한다.

안토니우스는 동부의 질서 회복을 맡은 중요한 임무라 생각하고 클레오파트라를 부른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 앞에 나타날 때는 거처로 운반된 깔개 속에서 21세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불쑥 나타내는 유쾌한 방법을 선택했다.
키케로의 말처럼 “탐욕스럽고 천박하며 창녀들과 시시덕거릴 줄 밖에 모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검투사 같은 사나이” 앞에서는 황금으로 칠한 선체를 타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하고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열리는 화려한 여신으로 등장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상대에 따라 대처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궁정의 호화로움과 클레오파트라의 재치를 만끽한다.

카이사르에게 배신을 당했다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현지에서 결혼을 요구한다.
이미 옥타비아누스와 이두정치로 누이 옥타비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중결혼을 한 셈이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민심을 이용해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치른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게 되고 끌레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도 자결한다.
숨이 남아있을 때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다는 전보를 듣고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것이 끝난 걸 인정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죽음으로 아들의 통치를 부탁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답이 없다.
그렇게 영묘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독사를 풀고 자결한다.

카이사르가 죽고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관계에서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로마에 머물고 있었다.
유언장에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서운함을 느낀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 함께 남몰래 로마를 떠났다.
남녀 사이를 공식화하지 않는 것이 모자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큰 뜻을 클레오파트라는 알지 못했다.
나중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의 아들 4명 중 카이사리온만 살해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지막 왕조를 지키기 위해 인생을 거는 외교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후흑술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도광양회처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와신상담했어야 하는데
결국 안토니우스와 결혼을 하고 전쟁을 치렀으나 패배했고 모든 걸 잃어버렸다.
매력적이고 지적이고 도전적인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