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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카우아이섬 종단연구, 왜 열악한 환경의 고위험군 아이들중 30프로는 역경을 극복할까

센스쟁이야 2024. 8. 2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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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에 미국 본토로부터 소아과 의사,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진 일군의 학자들이 절망과 좌절로 가득 찬 이 섬에 도착했다.
훗날 사회과학의 역사상 가장 야심 찬 연구 중 하나로 기록될 카우아이섬 종단연구오랜 세원동안 같은 연구대상자를 계속 추적 조사하는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연구자들은 1955년에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해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카우아이 섬이 연구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열악한 사회경제적 환경 때문이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불운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카우아이 섬이었다.
그리고 그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 섬에 산다.
인구유동이 적은 이 섬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닫힌 세상이었다.

연구자들은 1955년 한 해 동안에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사실 이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조사대상이 되었다.
연구자들은 1954년부터 출산할 산모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가 기념비적인 이유는 앞으로는 이러한 연구가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조사 연구를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실험 참가자의 의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강제로 실험 대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수조사표본을 추출하지 않고 조사 대상 전체를 연구대상으로는 것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식민지였던 가난한 섬 카우아이에서는 가능했다.

카우아이섬에서 1954년에 임신을 한 산모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심지어 10대 미성년자 임산부라 할지라도 예외 없이 연구 대상이 되었다.
연구대상이 되었던 신생아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데이터가 수집되었다.
산모의 건강, 가족관계, 직업, 성격 등 모든 사항이 장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기록되었다.
임산부뿐만 아니라 태아의 모든 가족 구성원에 대한 세세한 자료까지 전부 포함되었다.
이 연구는 결국 한 인간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겪는 여러 가지 건강상의 문제나 사건사고 그리고 가정 환경이나 사회경제적 환경이 그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어떠한 영향을 얼마만큼이나 미치는가를 체계적이고도 전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야심 찬 시도였다.
이 아이들이 30세가 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무려 90%에 가까운 698명이 조사 대상으로 끝까지 남았다.
종단연구에서 장기간에 걸쳐 이렇게까지 높은 잔존률을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카우아이섬의 연구자들은 어떠한 요인들이 한 인간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만들며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끄는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았다.
어렸을 적의 어떠한 경험이나 사건들이 훗날 질병, 성격적인 결함, 사회적 부적응, 무능력, 우울증, 정신질환, 범죄 등을 유발시키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얻은 연구 결과는 그러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일수록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었으며, 부모의 성격이나 정신건강에 결함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의 관계나 동료와의 관계가 좋은 아이일수록 자율성과 자기 효능감도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의 발견은 굳이 이런 대규모 조사를 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사실이다. 결국 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정도라 할 수 있다.

고위험군 201명 중에서 무려 72명이 별다른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고위험군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적 조건 때문에 사회적 부적응을 보일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아이들이었다.
이들 중 무려 72명이 마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으며, 긍정적이었고, 장래가 촉망되는 그야말로 정상적인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중 단 한 명도 심각한 학장애나 행동장애 혹은 사회부적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떠한 어려움이나 역경도 감히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고위험군의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던 것이다.

이것은 에미 워너 교수에게 풀기 힘든 커다란 의문을 제기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마이클이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케이나 메리로 하여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 이상으로 사회적응을 잘하게 만들어준 것일까?
그 당시 심리학이나 교육학은 이 질문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할 수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발견은 항상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다.
워너 교수는 별 볼일 없이 잊혀져갈 뻔한 연구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엄청난 발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미 워너는 이 72명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 되는 이 속성을 에미 워너는 '회복탄력성'이라 불렀다.
에미 워너는 무엇이 아이들을 사회부적응자로 만드느냐는 질문을 버렸다.
대신 역경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유지시켜주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카우아이섬 연구는 시작하고 나서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 회복탄력성에 대한 연구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워너 교수는 카우아이 섬 연구를 통해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했다.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제대로 성장해나가는 힘을 발휘한 아이들이 예외 없이 지니고 있던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엄마였든 아빠였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이든 간에, 그 아이를 가까이서 지켜봐주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서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말대로, 사람은 결국 사랑을 먹고 산다는 것이 카우아이 섬 연구의 결론이다.
아이는 사랑 없이 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먹고 자라야 아이는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아존중심을 길러가며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회복탄력성의 근본임을 카우아이 섬 연구는 알려준 것이다.

40년에 걸친 카우아이 섬 연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람마다 역경을 극복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이 바로 회복탄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