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세상
<역행자> 1. 자꾸 반복되는 실패의 원인을 알아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법 : 자의식의 해체
센스쟁이야
2024. 10. 20. 10:45
신이 망가뜨리고 싶은 인간이 있으면,
신은 먼저 그가 잘 될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 시릴코널리 <가능성의 적들>
나의 자의식은 내가 생각하는 나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발라드 노래처럼
자의식이 커지면 자만감이 된다.
애초 인간에게 자의식이란 게 왜 있을까?
자의식은 여러 감정과 지식을 엮어서 잘 반응하며 살아남도록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다.
단순한 생물들에겐 자의식이 없다.
에어컨이나 TV 속의 칩이 단순한 동작만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노트북이나 이보다 복잡한 슈퍼컴퓨터 등은 훨씬 복잡한 운영체제가 있어야 돌아간다.
여기저기에 리소스를 분배하고 입출력 장치를 연결하고 프로그램들을 돌리기 위해서다.
자의식이란 고도의 운영체제다.
그러나 외부 환경에 적응하고 행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자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
즉 운영체제가 폭주하면, 원래의 기능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외부 신호를 자꾸 왜곡함으로써 잘못된 판단과 생각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까?
수많은 연구가 수많은 답을 내놓았다.
방향은 비슷하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가급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급한 문제에는 오래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반응하고
(원시시대에 맹수가 달려들 때 심사숙고에 들어갔던 조상들의 유전자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는 대충대충 둘러대면서 뇌는 가급적 적은 에너지로 많은 일을 처리한다
(그래도 몸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쓴다).
너무 따지지 않고 대강대강 문제없을 정도로만, 나와 남을 적당히 속이며 '오늘만 대충 수습하는' 가성비 최고의 운영체제 덕분에 인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는 거대한자아가 남았다. 아주 거대한
문제는 자의식이 지나치면 오늘날에는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다.
잘못한 거래를 되새겨보고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관련 지식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 하는 행동은 어떤가?
괜한 희생양만 찾고 분풀이를 하다가 끝난다.
나아지질 않는다.
다른 경우라면 별 문제 없이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해주었을 자의식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나를 가난에 붙들어두게 된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막는다.
그저 알량한 내 마음 한 조각 편하자고 말이다.
이게 자의식의 역설이다.
스스로 멍청하다는 걸 인정하자.
스스로 못났다는 걸 인정하자
질투하는 대상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다
그 다음에 발전이 있다.
자의식으로 자아의 상처를 피해서는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기를 객관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엉뚱한 결정을 내기기 십상이다.
자의식이 굳어지면 일종의 방어막 같은 것이 쳐지면서, 새로운 생각과 사람, 기회 등을 흡수하지 못하게 된다.
‘남 탓’, ‘사회 탓’만 한다.
스스로를 파블로프의 개로 만드는 한심한 행동이다.
의지를 갖고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에 충실한 순리자의 삶 그 자체다.
어서 벗어나라.
스스로 왜 이런 것에 빠져드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그간의 시간이 의미 없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깨달았음에 감사하자.
자의식을 깨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역행자로 가기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