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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by 시오노나나미>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주사위는 던저졌다.

센스쟁이야 2025. 1. 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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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8년~51년(8년간)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 40~48세
기원전 49.1.18 루비콘강 건넘. 50세
기원전 49년~46년(3년간) 내전기, 50~53세
기원전 45년 개선식, 54세

<루비콘 강 건너다>

원로원 회의장에서 거행된 신임 집정관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이제 원로원 의원인 쿠리오가 발언을 요청했다.
카이사르한테서 받아온 편지를 낭독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 자필 서한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카이사르는 지금까지 그가 세운 수많은 무공을 그답게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둘째, 폼페이우스에게는 권리 유지가 허용되었는데 자신만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항의한 다음,
세 번째 타 협안 제시
폼페이우스가 에스파냐 총독을 사임한다면 자신도 갈리아 총독을 사임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사르는 자신의 이 제안에 대한 찬반 표결은 충분한 토의를 거친 뒤에 무기명 투표로 해달라고 말을 맺었다.

원로원 의장이기도 한 집정관은 이 서한의 세 번째 부분은 완전히 무시했다.
즉 토의도 없이 거수 표결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표결 결과 카이사르의 제안에 찬성한 것은 쿠리오와 키케로의 애제자였던 카일리우스 두 사람뿐이었다.
400명 가까운 의원들이 대부분 카이사르의 타협안을 거부했다.
제안 내용을 반대했다기보다는 카이사르의 서한을 최후통첩으로 느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반발한 게 분명하다.

내용은 온건파에 속하는 키케로도 현실적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상된 일이지만,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덕분에 이 표결 결과도 원로원 결의는 되지 못하고, 이튿날 재표결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타협안은 부결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당장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이튿날에도 다시 표결이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마찬가기였다. 그리고 거부권을 행사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49년 1월 7일,
원로원 회의장에서는 의장 역할을 맡은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카이사르의 제안에 대한 부결을 재확인해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지난 1월 1일에 표결이 이루어진 이후 몇 번이나 부결되었지만,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로 말미암아 아직도 원로원 결의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원로원 의원들 대다수는 또다시 '부'에 표를 던졌다.
물론 그날도 안토니우스와 또 다른 호민관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그날은 집정관 두 명이 강경했다.
호민관의 거부권 따위는 무시하듯, 일일이 거수 표결로 찬반을 물으면서 의사를 진행했다.

1.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귀국 명령에 복종할 것.
2. 후임자는 기원전 54년도 집정관인 도미티우스 에노발부스로 하고,
그에게는 당장 이탈리아 안에서 4천 명의 지원병을 모집할 권한을 부여한다.
그는 군단이 편성되는 대로 키 살피나 속주로 부임한다.
3.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와 직접 집정관 입후보 등록을 할 것.

카이사르 반대파가 강행 돌파를 결정하자.
호민관 안토니우스는 거부권 행사를 되풀이하며 그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카이사르 반대파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원로원 최종 권고'가 제출된 것이다.
이 비상사태 선언이 공포되면,
호민관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두 집정관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대권 수여를 인정하는 법안에 대한 찬반 여부도 결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국가의 적,
즉 반역자로 규정되어 재판받지 못하고 사형당하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지향한 사나이기도 하다.
그의 신념은 로마 국가체제의 개조이고, 로마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으면 즉 '원로원 최종 권고'에 굴복하여 군단을 내놓으면 내전은 피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질서 수립은 꿈으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는 지금까지 50년을 살아온 보람이 없다.
보람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명예는 이미 더럽혀졌다.
갈리아 전쟁 따위는 아예 없었던 것처럼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그동안 숱한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를 평정하고 게르만족을 몰아내어 국가에 지대한 공훈을 세웠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일파는 나를,
너희들의 총사령관을 제거하려 하고 있다. 그들의 음모로부터 나의 명예와 존엄을 지켜달라.
이 내전이 끝나면, 카이사르는 명예를 회복하고, 우리는 자유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그리고는 그를 쳐다보는 병사들에게 망설임을 떨쳐버리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장군의 뒤를 따르자!"

병사들도 일제히 우렁찬 함성으로 응답했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말을 달리는 카이사르를 따라, 한 덩어리가 되어 루비콘 강을 건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가 50세 6개월 되던 날 아침이었다.


<나의 느낀 점>
카이사르는 40세에 공직에 발을 올렸다.
지금도 늦은 나이지만 4천 년 전이니 더욱 연로해 보인다.

왜 늦었을까?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민중 파여서 술라를 피해 다녔고
대학 다녔고
병사로 들어가 눈에 띄어 속주까지 통치하게 된다.
자수성가했다.

지금의 유럽은 카이사르의 긴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원전 58년 로마는 선거에 의해 뽑히지 않는 귀족 원로원 600명이 공화정을 수립하여 통치하였다.
원로원이 행정부 수반 집정관 2명을 5년 임기로 선출하였다.
견제할 수 있는 민회는 호민관이 담당하였고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기존의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는 제국화된 로마를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먼저 그는 총독이었을 때 8년간 갈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다.
그때부터 갖고 있던 빚까지 다 갚고 부하들에게도 연봉과 인센티브를 듬뿍 주어 신임을 얻는다.

카이사르 군단과 함께 갈리아, 브리타니아, 이집트, 소아시아까지 경계선을 그어 로마 대 제국이 되었다.
동맹국과 속주라면 로마가 안전보장에 힘써주고
로마의 사회간접자본(법률, 로마가도, 상하수도, 화폐 등)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팍스로마나를 확립시키려 했다.

공화정체제를 제정 형태로 바꾸기 위해 본인이 독재관이 되었다.
원로원 수도 900명으로 늘렸다.

이에 왕정정치를 꿈꾸는 거 아닌가 원로원은 반감을 갖게 됐고
위기의식을 느껴 그만 44년 3월 15일 암살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천재였다.
관용의 사나이였다.
누구에게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강요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를 배신했더하더라도 받아주었고
술라의 독재를 답습하지 않으려고 관용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클리에텐스 “관용”

전쟁과 정치의 달인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지 않았고
유머러스하고 밝은 사나이

전쟁이 끝나고도 부하들은 휴식기를 갖게 했고
본인은 다음 임무를 위해 쉬지 않았다.
젊은 병사들의 인기를 독차지해서 따르는 병사들이 많았다.

남의 돈으로 혁명을 일으켰지만 사적으론 사용하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주었고, 전쟁비용, 도로나 공공시설에 투자를 했다.
본인은 관저에서 생활했고 화려한 별장도 없었다.

멋쟁이 카이사르를 올해 이탈리아 포로 로마노에서 봤다.
햇살 퍼지는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면서
카이사르의 땀과 재능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나폴레옹도 카이사르를 존경하는 마음에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를 탐독했다고 한다.
카이사르 나이만큼 나도 나이가 먹어 다시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에 이런 인물이 살았다니
참 로마인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