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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는 늘 갑작스런 요소가 첨가되는 법입니다.
한신과 팽월은 폐하가 거병할 때는 곁에 있지도 않았고,
또한 폐하와 고난을 함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천하를 차지하려는 지금.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으면 항왕에게 이길 수 없고,
이 두 세력이 떨어져 나가면 천하는 고사하고 폐하의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드나이다.
지금 폐하에게 필요한 것은 천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치를 통찰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통찰하려면 작은 나를 버려야 하나이다."
"아, 이제 천하가 보이네."
유방은 갑자기 외쳤다.
"천하를 한신과 팽월에게 주어도 괜찮을 것 같네."
"잘 보셨나이다."
"그럼 나는 패로 돌아가야 하느냐?"
유방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패로 돌아가 은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정도의 각오로 한신과 팽월에게 큰 상을 주어도 좋다는 결심이 선 것이다.
그리하여 팽월을 실질적인 위왕-명칭은 양왕으로 삼아, 수양북쪽과 곡성까지 모든 땅을 그에게 주었다.
한신의 영토는 광대했다.
진에서 바다에 이르는 모든 지역이다.
이 대륙에서 가장 풍요롭고 인구도 많은 지역이 그 두 사람에게 주어졌다.
'두 사람은 기쁘게 그 땅을 받고, 병력을 이끌고 항우를 치러 올 것이다'
장량은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장량은 두 사람이 그 땅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후일 그것으로 인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군을 능가하는 공을 세우고, 주군을 능가하는 영토를 차지하면,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반드시 견제를 받게 되어 있다.
통일 후에도 주군인 유방이 여전히 마음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후일, 장량의 예감은 적중했다.
유방은 여전히 관대했지만, 그의 아내 여는 그 두 사람을 원수처럼 생각했다.
여후뿐만 아니라 군신 가운데서도 시기하는 자가 많아서 두 사람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결국 두 사람 다 죽임을 당하고 봉토를 빼앗기고 만다.
장량은 미래를 바라보는 특출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일, 유방이 장수들에게 대한 논공행상을 했을 때, 장량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3만 호에 달하는 봉토를 주려 했으나
장량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인이 처음 폐하를 만난 것은 유(留: 강소성)의 교외였나이다.
그곳만 주셔도 충분하나이다."
그러나 한 가지 항우가 새로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고향 초나라에 대해서였다.
이 오랜 전투 속에서 자신은 한번도 고향의 부로들을 찾아간 적이 없고,
또한 높은 직위에 있는 대리인이라도 파견하여 그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게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유방은 때로 관중까지 갔다.
광무산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도 퉁퉁 부은 몸을 수레에 싣고 관중으로 돌아가 부로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그랬기 때문에 관중의 부로들은 젊은이들을 무한정 유방의 전선으로 보내주었는데,
항우는 물론 그런 유방의 행동을 모르고 있었다.
유방이 부상 당한 몸으로 관중으로 갔다는 사실조차 항우는 모르고 있었다.
이제 천하의 어느 곳에서도 원군이 오지 않는 사태에 직면하여
항우는 비로소 초나라와 그 땅의 부로들과 강남의 풍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항우는 유방에 비해,
또는 어떤 사람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자아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목구멍을 통과한 다량의 음식물은 들어가는 족족 힘과 욕망으로 변했다.
유방도 젊은 시절에는 욕심쟁이라는 평판을 받았다.
그와는 달리 항우의 몸에서는 무진장한 생기가 불꽃처럼 솟구쳐.
적을 찾아 짓밟는 것 외에는 그 생기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 불꽃 때문에 항우는 타인의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항우는 전략과 정량에 관련된 감각을 갖지 못했다.
항우는 우희를 끌어안은 채 깊은 잠을 잤다.
이윽고 을(乙밤 9시에서 11시 사이)가 지날 무렵 잠에서 깨어났다.
멀리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바람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멀리서 군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건 초나라 노래가 아니냐'
항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장하고 성루에 올라보니, 들판을 가득 메운 횃불이 그냥 그대로 별하늘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노래는 성내의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 바깥의 들판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초나라의 말은 중원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음률도 다르다.
초의 음률은 슬프다. 때로 흐느끼는 듯 하기도 하고, 때로 원한에 찬 듯하여 들으면 금방 초나라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四面楚歌.
'우리 병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한나라 편을 든단 말인가'
그 순간 항우는 초왕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깨달았다.
초나라 사람의 지원을 받을 때 비로소 초왕이며, 그 백성이 등을 돌린 한 항우는 이미 이 땅에 존재할 이유도 가치도 없었다.
천하를 통일한 7년 후, 유방은 반란을 일으킨 경포를 물리치고 개선하여 돌아가는 중에 그립던 고향 패에 들렀다.
그는 부로들과 젊은이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역사적인 금의환향이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유방은 축(비과처럼 생긴 악기)을 두드리며 자작곡의 노래를 불렀다.
큰바람 불고 구름 높이 오르니
위풍을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용맹한 인재들로 사방을 지켜 태평천하를 이룩하리
大風起兮雲飛揚威加海内兮歸故鄉安得猛士兮守四方
유방은 소년 120명을 모아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에게 선물을 내렸다.
"내 비록 관중 땅에 도읍을 정했지만, 짐은 죽어도 이 패 땅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짐은 패공으로 일어서서 진제국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얻었노라.
이 패 땅을 직할령으로 삼아 이 땅의 백성에게는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겠노라."
서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석 자의 칼로 천하를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니,
상처도 하늘의 뜻에 따를 것이다."
결국 유방은 화려한 장락궁에서, 자신의 사후에 빚어질 잔혹한 살상과 권력다툼은 상상도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3세, 항우가 죽은 지 7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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