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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방."
유방은 힘없이 장량을 불렀다.
"나는 패에서 그냥 어슬렁거리며 일생을 보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장량은 위로의 말을 찾으려다가 찾지 못하고 연민에 가득 찬 눈길로 유방을 바라보았다.
"천명이지요."
그것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장량은 유방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항우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천명이기에,
때로 저항하고 때로 울고 때로 굴복하고 때로 싸우고 허둥대면서 항우와 맞설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뭐가 어찌 됐든 무조건 항우에게 읍소하여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충성스런 부하인지를 설하고,
무조건 울면서 상대방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장량은 말했다.
유방은 입구에 가까운 낮은 자리를 가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항우가 참모 몇을 거느리고 들어서더니, 철커덩, 하고 검을 바닥에 내리치면서 넙죽 엎드린 유방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짐승처럼 포효하며 따졌다.
항우는 그런 기세로 그냥 유방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유방, 네놈의 죄상은 수도 없이 많아.
첫째 함곡관을 막고 공격을 가한 것.
함양에서 진나라 자영을 상장군인 나의 허락없이 함부로 살려준 것,
제멋대로 진나라의 법을 바꾸어 유방의 법을 포고한 것.
이 세 가지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고 항우는 따졌다.
유방은 기는 듯한 자세로 넙죽 엎드려 있다.
여기에 이르러 항우의 살기등등하던 기세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항우의 신발 끝이라도 핥을 듯한 자세로 얼굴을 땅에 박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 세 가지에 대한 자신의 의도를 이야기하고,
모든 것은 대왕(항우)을 위해서이며,
또 대왕에게 관중을 넘겨주기 위한 것일 뿐, 무슨 다른 뜻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사내였던가!'
항우는 소하는 유방의 모습을 보고 그만 살기를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유방은 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면서,
자신은 대왕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관중을 공략하여 결국 진나라를 쳐부수긴 했으나,
이렇게 대왕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 것은 모두 자신이 부덕한 탓이며,
아마도 소인배의 중상모략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이르러 항우의 살기등등하던 기세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상모략?"
항우는 그만 유방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대를 중상한 자는 바로 조무상이란 사내야"
항우는 유방 휘하의 배신자 이름까지 밝히고 말았다. 그의 감정이 유방에 대한 호감으로 바뀌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좌사마 조무상이!'
유방의 기묘한 점은 그런 사람에게도 증오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방은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그 목소리가 가늘게 멀어져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죽음의 신은 이미 사라졌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유방은 머리를 약간 들어올리려 했다.
"패공."
항우가 다시 부르는 바람에 유방은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빨리 자리에 앉으시게."
항우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때 항백이 나타나 유방의 손을 잡았다.
바닥에 넙죽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그걸 보고 항우는 리듬을 잃고 만 것이다.
‘교활한 유방놈이 항우의 그런 기질을 이용한 게야.
멋지게 분위기를 바꿔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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