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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님! 예전에 제게 계율을 내리시고 법명을 주시면서 공덕을 닦으라 하시더니,
이제 와 그 공덕이 무(無)라 하시고 공(空)이라 하십니다.
공덕을 닦아도
까닭 모를 바람에 흩어져버리고,
재에는 향기가 없고,
허공엔 연기가 없다 하십니다.
제 몸은 껍데기요 마음은 텅 비었다 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누구입니까?
저는 어찌 살아야 합니까?"
"까불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아라.
얻었다 좋아 말고,
잃었다 슬퍼 말아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오늘 해는 내일도 뜬다.
오늘은 내일과 다르지만, 그 해는 어제 떴던 바로 그 해니라.
같지만 다르고, 다른데도 같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이치를 네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을 너는 알겠느냐?
있지도 않은 마음을 잡았다고 하지 말아라.
허공 속의 연기를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
종을 떠난 종소리를 어이 쫓아 잡으리.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아야지.
하나 속에 없는 것이 없고.
그 많은 것들 속에 든 것도 기실은 하나뿐이니라(中一切多中).
그렇다면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다름아닌 하나가 아니랴? (切多)
티끌 하나 속에도 시방세계를 머금었으니(一微塵中亦含十方),
그 많은 티끌마다 다 그렇지 않겠느냐?(一切中如是]
흐르는 물처럼 순리를 따라 이치로 본다면 네 마음이 허공처럼 맑아질 것이니라.
텅 빈 산에 사람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었다(空山無人 水花開).
손가락을 들어 흐르는 물을 가리켜 보렴.
네 손가락 끝에서 흰 구름이 피어오를 것이니라.
네가 세계가 되고,
향기가 되고,
허공이 되고,
우주가 될 것이니라.
제자야! 네가 이 뜻을 정녕 알겠느냐?"
이렇게 해서 큰 스님 앞에서 깨달은 체하던 사미승은 앞서 송광사의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엉엉 울며 엎드리고 만다.
관재(齋)란 벗의 집을 위해 글을 써주면서 박지원이 엉뚱한 이야기를 끌어온 까닭은 이렇다.
'자네가 이 집에서 무언가를 보려 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무엇을 보려 하는가?
아니 그 전에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려면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일세.
보려면 정신 차리고 보아야 할 것이네.
헛 것을 보지 말고 제대로 보아야지:
담배 연기와 향로 연기를 가지고 쓴 두 편의 글을 읽었다.
장난투가 있지만 행간에 만만찮은 내공이 느껴진다.
공연히 아는 것 많은 체해봤자.
우리가 이런 글 한 줄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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