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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이 보기에는 좀 사랑스러운 바보 같았다.
말 그대로 멍청이란 뜻의 바보가 아니라
늘 자신을 방치하는 듯한 표정으로 실체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커다란 포대 같은 사람이었다.
그냥 바닥에 떨어진 포대는 형태도 흐릿하고 두리뭉실하다.
포대는 용량만 클 뿐 두뇌도 사고도 없다.
그러나 집단의 동량으로서는 그런 포대가 현자보다 더 적합할 수도 있다.
현자는 자신의 뛰어난 사고력이 그냥 한계가 되어버리지만, 커다란 포대는 현자마저도 그 안에 담을 수 있다.
'유방이란 사내는 포대 아니면 진흙덩어리 같은 존재야.'
한신은 대화를 나누면서 유방이라는 남자에게 신선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멍하니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긴 이야기를 끝내는 순간 그는 갑자기 그럴듯한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유방은 오른손 주먹을 치켜들고 너무 기쁜 나머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장군! 나는 자네를 너무 늦게 얻었어
유방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유방은 한신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자기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고,
내일부터 행동해야 할 모든 방침과 일정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 점에서 귀족 출신 장량은 소극적이고 신중했다.
한신은 잃을 게 아무것도 없는 서인 출신으로 표현이 솔직하고 노골적이며,
사물을 냉혹할 정도로 정확히 관찰하는 능력과 습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유방이 장량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한신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계급 출신의 한신의 말이 비슷한 감각을 가진 유방에게
강렬한 친화성을 발휘하며 펄펄 살아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방 군, 즉 한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는 초가을, 산악지대의 한낮은 바위라도 달굴 듯이 뜨거웠고,
밤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하늘의 별마저 꽁꽁 얼어붙게 했다.
이미 한군은 한중으로 들어서면서, 모든 길을 폐쇄하고 잔도를 불태워 다시 관중으로 나아갈 뜻이 없음을 천하에 알렸다.
그런 행동은 중원에 있는 항우를 안심시켰다.
나아가 항우가 유방을 막기 위해서 관중왕으로 봉한 장한 장군마저 안심시켰다.
"유방은 한중에 틀어박혀서 거기서 늙어 죽을 생각인가 봐"하고 장한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진 제국 말기에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장한조차 유방을 그렇게 평가한 이유는
그가 진나라 출신이었던 만큼 지리에 밝았기 때문이다.
관중과 한중 사이에는 하늘을 오르기보다 힘든 험준한 산들이 겹치고 또 겹쳐서 변변한 길이 없었다.
하늘을 잇는 듯한 절벽에 잔이라는 판자를 걸쳐서 겨우 발을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마저 항우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불태워버렸다.
유방이 새가 되지 않는 한 외부세계로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이라는 두뇌를 얻었다.
한신은 관중으로 진입하기 위해 먼저 잔도의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미증유의 대공사였다. "동으로 진격한다!"
그렇게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나무를 지고 바위산을 오르게 하고, 구멍을 뚫고 기둥을 비스듬히 세워 그 위에 판자를 깔았다.
후일 이백은 그 속도를 '산이 무너져 젊은이들이 죽어간 길'이라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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