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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상

<로마인이야기 by 시오노나나미> 카이사르 어록들

by 센스쟁이야 202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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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식>
1. 갈리아인에 대한 승리 : 갈리아 전쟁기 8년

2.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공주에 대한 승리 : 알렉산드리아 전쟁 승
    - 이집트 선왕의 유언장
      (맏공주와 맏왕자 공동으로 통치할 것, 이집트 왕실은 앞으로도 꼐속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남을 것
    - 소년 왕이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단독통치하고 클레오파트라는 수도에서 쫓겨난 상태
      카이사르가 오누이가 화해하고 다시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라는 판정을 내림
     소년왕이 반기를 들어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리아 전쟁 5개월 치름, 카이사르 승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롤레마이오스 14세 공동통치자 지정, 새로운 동맹관계 수립
   - 클레오파트라와 2달간 휴가, 나일강 수원찾기
  
3. 폰토스 왕 파르나케스에 대한 승리
   - 소아시아 안티오키아에 도와주라 편지가 옴
     오늘날의 터키의 질레, 카이사르 승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말보로 담배갑 앞뒤에 찍혀 있는 문장 밑에 VENI.VIDI.VICI'(베니, 비디. 비시)라는 라틴어가 적혀 있다.

4. 누미디아 왕 유바에 대한 승리 : 아프리카 전쟁기
    - 불리함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그의 행동거지는 믿음과 희망에 가득차있음
    - 카이사르가 전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실수는 하되 똑같은 실수는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적의 보급기지인 우티카에서 적군을 끌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삼았음
    

   “적을 용서하는 카이사르와 자기 편을 버리는 폼페이우스는 얼마나 다른가!"
    - 키케로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
  - 카이사르 내전기

카이사르는 냉철하긴 했지만 냉혹하지는 않았다.

분노나 복수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고 일어날 수 있는 행위다.
카이사르가 평생 이것과 무관했던 것은 분노나 복수가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성에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월한 자신이 왜 열등한 타인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똑같이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그들과 똑같이 복수심을 불태워야 하는가.
술라와 카이사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점에서는 양극단이었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런 카이사르를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한다.

카이사르는 우선 그가 수립하고자 하는 새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를 내걸었다.
개선식 때 배포된 기념 은화의 한쪽 면에는 '클레멘티아'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카이사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술라와는 다르다"고 공언했다.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의 목이 효수되는 일도 없었다.
귀국과 복직을 원한 사람 가운데 카이사르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여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한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의 귀국도 허락했다.
카이사르가 원한 것은 적도 동지도 없이 일치단결하여 국가 로마의 재생을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카이사르가 달력을 개정하기로 결심한 것은 이 차이를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확한 달력만 만들면 '로마 세계'의 어디에서나 받아들여질 테고,
그에 따라 생활 리듬도 어디서나 같아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 세계는 로마의 군사적 패권이 미칠 뿐 아니라.
문화는 다양해도 문명은 공동이어야 한다.
나날의 생활을 재는 기구인 달력을 공유하는 것은 문명 통합의 첫걸음이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알게 된 이집트인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들이 달려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카이사르의 초빙을 받고 로마에서 그 작업에 착수한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했다.
따라서 365일이 1년이고, 이것은 다시 열두 달로 나뉜다.
그리고 1년마다 생겨나는 6시간의 오차는 4년에 한번씩 2월 23일과 24일 사이에 하루를 끼워넣어 청산한다.
결국 그해 2월은 29일이 된다. 이리하여 태양력이 탄생했다. 이
달력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력(曆)'이라고 불렸다.


카이사르는 유쾌하고 천재다
유머러스 했고 슬픔과 분노는 표출하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돈은 책을 샀고 애인에게 비싼 선물 사주는 것으로 쓰였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계속된 전쟁을 이겼던 그의 전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다리도 놓고 공벽도 쌓는 공학자 수준이다.

카이사르는 관용을 최우선으로 했다.
술라, 옥타비아누스 등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숙청하는 법인데
카이사르는 패국민에게 선택할 자유를 준다.
절대 관용, 클레멘티아, 바람으로는 옷을 벗길 순 없어도 따뜻한 햇빛으로 가능하다.
정치의 신이다.
비록 암살 당하긴 했지만 죽은 이후 민심은 그를 신격화 했다.

카이사르는 남의 돈으로 혁명을 이루었다.
갑부 크라수스의 돈을 빌려 채무가 막심해서 총독으로 발령났을대도 빚쟁이들이 집 앞에 몰려와 떠나지 못할 지경이었다.
로마에서 갑부였던 크라수스를 삼두정치로 끌어들여 계속 후원하게 했다.
갈리아전쟁기 8년을 치루면서 빚은 다 갚았고 공공사업과 군단비로 쓴다.
병사들이 충성을 다한다.
자신에게는 전혀 쓰지 않았다.